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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전해져 내려 온 과정
김정빈 2015-07-01 추천 0 댓글 0 조회 927
 

이 자료는 KCM 자료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티오크(Antioch,안디옥) 교회가 성경전서를 순수하게 보존하여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보급하고 있었을 때,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도시에 살던 오리겐(Adamantius Origen,A.D.185-254)이란 사람이 안티오크 크리스챤들이 전해준 성경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가장 저명한 학자로서 스스로를 성경교사요 신학자라 공언했지만, 실상은 바알숭배자이자 철학자인 플라톤의 혼합주의(syncretism) 신봉자였다.  

 

 오리겐은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구자가 되었고, 기독교와 플라톤 철학의 결합을 시도한 혼합적 영지주의자였다. 그는 안티오크 크리스챤들이 전해 준 성경을 자신의 사상에 맞게 뜯어 고치고 플라톤 철학과 혼합시키는 대수술작업을 가하여 헥사플라 (Hexapla,육단 대조 성경)라는 전대미문의 위조성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성경에다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변절한 유다인들이 만들어낸 외경들을 포함시켰는데, 오늘날 사본학에서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라 함은 바로 오리겐이 난도질하여 만든 위조 성경의 사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소위 칠십인 역(LXX)이라는 것도 오리겐의 헥사플라에서 처음 등장한 위조성경이며, 그 이전에 번역되었었다는 설은 학자들에게도 이미 사실무근임이 밝혀진 바 있다.  

 

 그 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 때 유세비우스(Eusebius Pamphili,A.D.264-349경)라는 학자는 오리겐의 헥사플라 중 다섯째 칼럼을 편집하여 로마 제국의 공인성경 50권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학자들에 의해 가장 권위있는 사본으로 여겨지고 있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콘스탄틴때 만들어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으로서, 바로 유세비우스가 편집한 오리겐의 위조성경이었다. 이 두 사본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콘스탄틴은 이 50권의 공인성경(위조성경) 외에 어떤 성경이라도 소유하거나 읽거나 배포하는 자는 모두 체포하여 목을 자르고 그들이 지닌 성경은 압수하여 불사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안티오크 교회 출신의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콘스탄틴 황제의 핍박을 피해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가서, 피에드몽 골짜기를 거점으로 제국 전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였다.  

 

 그들이 주로 전파한 성경은 코이네 그리스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번역해 준 A.D. 120년 경 라틴 벌게이트(the Latin Vulgate)라 불리운 성경이었다. 안티오크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이 비공개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퍼지면서 당대의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자리잡아 가자, 당시의 다마수스 교황은 라틴 교부이자 저명한 학자인 제롬 (Jerome,본명은 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340-420 년경)을 시켜 위조 라틴 벌게이트 를 만들게 하였고, 그것으로 원래의 라틴 벌게이트를 대체시켜 버렸다. 오늘날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가 그것으로서, 그 위조성경은 훗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로마 카톨릭 공인성경으로 채택되었다. 이제는 학자들에 의해 안티오크의 라틴 벌게이트가 구 라틴 벌게이트 (the Old Latin Vulgate) 혹은 구 라틴어 성경 으로 불리고 있고, 대신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라틴 벌게이트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로마 카톨릭을 위한 성경이라는 증거는 마태복음 3장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다 에서 회개하라 (repent)를 고해성사하라 (do penitence)로 번역한 사실 하나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비록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로마의 공권력에 의해 구 라틴 벌게이트를 대체하려 하였지만, 비잔틴 제국 전역에서 일반일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아니라, 구 라틴 벌게이트였다. 존 위클리프가 최초의 영어 신약전서를 번역한 것이 바로 구 라틴 벌게이트에서였고, 이때문에 로마 카톨릭은 위클리프가 죽은 뒤에 그의 시체를 파내어 다시 화형시키기까지 하였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복음의 빛을 받게 된 것도 바로 구 라틴 벌게이트를 읽으면서였다.  

 

 이 즈음에 로마 카톨릭의 학자 중 매우 이례적인 인물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1469-1536)가 등장하였는데, 그는 교황과도 절친한 카톨릭 학자이면서도 주로 로마 카톨릭의 부패상을 꼬집고 카톨릭 사제들의 위선행위들을 냉소하는 책들을 많이 저술한 반카톨릭 인문주의자였다(그의 저술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대부분 금서로 지정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이 공인(公認)한 성경이 가짜 성경이고, 오히려 일반인들 가운데 비공개적으로 퍼져 있는 성경이 참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학자답게 최초의 코이네 그리스어 성경 원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그리스어 성경을 단 한 권도 구할 수 없게 되자, 바젤에서 수집한 부분적인 그리스어 사본들을 가지고 짜맞추고 구 라틴 벌게이트에서 보충하기도 하여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로마 카톨릭에 의해 변개되지 않은 그리스어 성경을 편집 출판하였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은 그후 스테파누스와 베자, 엘지버 형제들의 손을 거치면서 수정 보완 되었다. 특히 1633년에 출판한 엘지버 제2판의 서문에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본문을 갖게 되었다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는 표현을 쓰게 되면서부터 소위 공인 원문 (共認原文,Textus Receptus)이란 타이틀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즉 공인원문(TR)이란 직접적으로는 에라스무스로부터 시작되어 엘지버 판에 이르는 그리스어 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공인원문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변질되지 않은 그리스어 사본들을 재생시킨 것이기 때문에 TR주의자들은 안티오크 교회 이래로 순수히 보존된 전통원문(Traditional Text)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TR주의자들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TR은 결코 완전한 성경이 아니며 (그들 스스로 85-95 % 가깝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최종권위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자신들이 말한 대로 95%신뢰수준이면 5%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란 뜻이다. 신구약 성경이 1754페이지 분량이기 때문에 만약 5 %에 대하여 확실하지 않다면 88페이지 정도의 분량은 확신이 없었다는 뜻이다. 

 

후스, 위클리프, 에라스무스 등의 학자들이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애쓴 보람으로 로마 카톨릭 안에서도 바른 성경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루터, 칼빈(깔벵), 쯔빙글리, 낙스 등의 개혁자들이 등장하면서 소위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봇물이 터졌다. 내 백성아, 그녀(음녀 바빌론)에게서 나오라 (Revelation 18:4)는 말씀에 순종하여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뛰쳐 나왔다. 때를 같이 하여 서민들 속에 감춰져 온 참 성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로 영국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영어 성경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틴데일 성경,카버데일, 매튜,타버너,대성경 및 제네바 성경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제네바 성경 (1557,1560)은 스테파누스 TR에서 번역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킹 제임스 성경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가장 널리 보급된 프로테스탄트 성경이었다.  

 

 그러나 철저히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던 앤드류 폰 칼슈타트나 처음부터 참 성경을 지켜온 아나밥티스트(재침례교도)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절반만 나왔고, 성경으로는 절반만 돌아갔다. 루터, 칼빈을 비롯한 개혁 지도자들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입장에 서서, 구원의 교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카톨릭 전통들(성직제도, 성례전, 교회행정, 헌금제도 등)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반면 성경에 대한 입장은 학자들의 원본주의를 따랐다. 오늘날 개신교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다시 로마 카톨릭의 신바빌론주의로 되돌아가고 있고, 불완전한 사본에서 번역된 수많은 불완전한 번역 성경들을 신봉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개혁자들의 개혁이 왜 실패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영국에 일찍부터 복음이 들어가서(A.D.37년경) 안티오크의 구 라틴 벌게이트가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로마 카톨릭의 영국진출이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은 유일하게 반 카톨릭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사용하여 인류에게 완전한 성경을 선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영국 해군에게 극적으로 패배한 사건을 기점으로 대영제국이 스페인을 대신하여 해가 지지않는 나라로 부상하였다. 스페인어 대신 영어가 세계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영어는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포함한 어떤 언어보다도 더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를 지닌,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전무후무한 세계어(world language)로 자리잡았다. 히브리어, 그리스어는 이미 사어(dead language)가 되었으나, 영어는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현재 사용하시고 계신 계시언어가 되었다. 

  

 1611년 제임스 왕 1세 때 드디어 킹 제임스 성경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제임스 왕 자신이나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50여명의 학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영국 국교회와 주교들의 입지를 뒤흔들어 놓았고, 처음에 정한 번역 원칙들을 무시한채 TR과도 다르고 비숍스 성경과도 다르게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귀족들과 사제들보다는 오히려 일반인들 가운데서 그 권위가 인정되면서 기존의 모든 성경들을 대체해 나갔기 때문이다. 림스듀이 성경을 비롯한 로마 카톨릭 성경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가장 인기 있는 프로테스탄트 성경이었던 제네바 성경 및 심지어는 구 라틴어 성경까지도 대체해 나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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